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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산행기

아들과 함께한 가산산성 둘레길 산행

* 가산산성() 내성의 가운데 있는데 80평 규모이며 일명 가암()이라고도 불리우는 가산바위의 정상부

1. 산 행 지 :가산(902m),가산산성 / 대구광역시, 경북 군의군, 칠곡군

2. 산행일자 : 2010년 09월 18일(토) / 맑음,개스

3. 산 행 자 : 아들과 함께

4. 산행경로 : 진남문-남포루-가산바위-서문-황학지맥 분기봉(852봉)-중문-가산-동문-쉼터-해원정사(도상거리약10.0km)

5. 산행시간 :3시간 50분(14:40~18:30)

6. 산행지도(출처 : 갈대)

* 칠곡부읍지에 수록된 가산산성의 배치도

* 가산산성 주변도(출처 : 매일신문 팔공산하)


7. 산 행 기

사적 제216호로해발 901m에서 600m에 이르는 계곡을 이용하여 쌓은 포곡식과 테뫼식으로 축조된 가산산성의 진남문


진남문의 성문


영남제일관(진남문)을 통과하여 곧장 좌측 성곽길로...가산산성은 수차례의 산행길이지만 오늘은 가산산성 성곽길

산행을 경험하기로 하고 처음 가보는 남포루를 경유해 가산바위-서문-북문으로.....

숲길로 접어들면 허물어져 가는 산성길을 따라 오르면 된다


세월의 무개를 이기지 못하였지만 산성의 모습은 유지되고 있다


바위공터를 지나 작은 바위와 소나무 숲길의 오르막이 시작된다


간간이 전망이 트이는 작은 암봉에 오르면 송정마을과 도덕산,응해산1(526.4m)와 응해산2(506.7m)의 풍경이 보인다


거대한 바위들이 나 딩굴고 있는 소나무 숲길을 오르고....


오로지 성곽길만 따르된 된다


편편한 안부의 거대한 바위를 지나 가파른 성곽길을 오른다


성곽에 올라서면 전망이 좌측으로 트이기 시작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곤 한다


369.8봉,도덕산, 응해산1의 전경


우측에 우회로가 있지만 밧줄을 잡고 오르면......


뚜렷한 산성길이 이어진다


서서히 오르막이 시작되는가 쉽더니 가장 난해한 암릉길이 기다리고 있다


아직은 암릉을 타기에는 익숙치가 않고 도와 주어야 오를 수 가 있다


올라온 암릉길


암릉을 지나 암벽에 오르면,,,,,,


치키봉과 부계봉(783.6m)넘어로 팔공산의 서부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당겨본 팔공산 서부능선의 전경


369.8봉, 도덕산(660.2m), 응해산1(526.4m)와 응해산2(506.7m)와 송정마을의 풍경


잠시 쉬면서....


알고보니 여기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올라오는 적을 향해 포를 쏘아 적의 사기를 저하 시켰다는 설이 전해오는 닜고

지형적으로 이곳이 전망대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인 남포루의 암릉이다


남포루 방어를 위해 포를 설치했고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던 기지였던 남포루 터(대경문화재연구원)

남포루의 성벽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은밀한 곳에 일반 성문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개구부를 내어 출입하는 성문의 일종인 암문(暗門)


여릿재 갈림길인 구조목 07-16번에서 우측 산성길을 따르고....


15개의 암문(暗門)존재 하다는데 가산바위 까는길에 두번째의 암문을 지난다


가산바위까지 구조목과 성곽길을 따르면 되는 익숙한 길이 이어진다


성곽길에는 야생화가 지천에 피어있다


수풀이 우거진 좁은 성곽길....우측 내성길인 중문 성곽길 갈림길에서 직진...


온전한 상태로 보전된 성곽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가산바위 입구


계단을 오르면 가산바위이다

가산바위와 가산 정상을 배경으로....


가암()이라고도 불리우는 가산바위(우측 바위 표면에 세겨져 있음)


사면이 깎아지른 듯이 우뚝 솟아 있는 바위로,상면에80평 정도의 넓은 평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고승 도선()이

지기()를 잡으려고 바위 위 구멍 안에 쇠로 만든 소와 말의 형상을 묻었는데 조선시대 관찰사 이명웅()이

성을 쌓으면서 없애버렸다는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가산바위에서 바라보니 땅재 옆으로 유학산.황학산,백운산과 금오산도 보인다

가을을 느끼게 하는 가산바위에 피어난 억새


두무실(계정사 갈림길을 지나 서문과 852봉(항학지맥 분기봉) 방향으로 진행한다


서쪽방향에도 산성길이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다


가산산성의 제일 북쪽 돌출된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원형 그대로 보존된 듯 그 형태가 온전한 서문


황학지맥 분기봉인 852봉에서 모래재 가는길은 급경사의 내리막 길이다

852m봉에서 북쪽으로는 팔공기맥의 '위천지맥'이 출발한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황학지맥'으로 연결돼 가는

산줄기가 이어진다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은밀한 곳에 일반 성문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개구부를 내어 출입하는 성문의 일종인 암문(暗門)


수풀이 우거져 북문을 찿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보니 가산바위 아래 장군정에 이른다

조선조 인조17년 외적의 칩입을 막기위해 가산산성을 지키던 장수들이 식수로 사용하였던 장군정이란 샘터


중문으로 오른다


가산산성 내성의 중앙을 가로막아 내성의 1/2을 보호하기 위하여 1741년 중성 축조 시에 만들어진 중문


중문에서 왼쪽길로 들어서 내려가면 가산산성내 4개의 연못중 하나인 습지를 지나 봄철에 한창인 복수초 군락지를 오르고..

가산 정상부의 억새밭을 지나 오르면 가산 정상과 용바위,유선대 갈림길에서 좌측 용바위 방향으로....

가산 정상아래 돌출 전망바위(용바위?)


돌출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팔공산의 전경


아니면 이놈이 용바위???? 몇번씩 와 보아도 표지판이 없으니 영 구분이 안간다

펜스전망대가 있는 유선대


유선대에 오르면....


돌출전망대와 팔공산 서부능선이 조망이 된다


북창바을의 전경과 멀리 의성 지역의 작은 산군들이 희미하게 보이는 곳이다


가산[] 정상에서


긴내리막을 따라 할미,할비바위와 치키봉 방향으로.....


가산산성에는 정식 문 이름이 붙여진것 이외에 군대군대 사람이 드나들수 있게 암문(暗門)이 많들어져 있다


한티재 갈림길 이정목의 827봉에서 좌측 한티재 방향으로....


군데군데 나타나는 암문(暗門)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할비바위-치키봉은 포기하고 이곳에서 동문으로 하산한다


외성 축조 이전까지 내성의 정문이었다는 동문에서


낙엽길을 걸으니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너무 늦은 산행이라 이곳에서 잠시 실례를 무릅쓰고 임도길은 피하고 곧장 하산길로....


수차례의 임도길을 만나고 다시 숲길로.....

대나무 숲을 지나 어둠이 내려오고 있는 공원관리사무소에 닿는다


진남문을 나오니...


벌써 노을진 하늘에는 반달이 떠있다

가산산성[架山山城]

경북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
가산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잇따른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가산( 架山)요새에 삼중(三重)으로 축성되었다.

1639년(인조17)에 경상도 관찰사로 제수된 이명웅(李命雄, 1590~1642)이 “경상도 60주(州) 산성 중에 믿을 만한 곳은

진주(晋州)·금오(金烏)·천생(天生)의 3성 뿐이므로 적지(適地)에 축성할 것”을 상주(上奏)하였다.

도임 후 천생산성(天生山城)은 형세가 험하기는 하나 좁고 천정(泉井)이 없으므로, 금오산성(金烏山城)을 가축(加築)하는

한편, 최적지인 팔거현의 가산(架山)에 축성할 것을 계청(啓請)하고, 그해 9월부터 이듬해(1640년) 4월까지 내성을 쌓았다.

가산산성이 축성되면서 5월에는, 경산부(京山府: 현재 성주)에 속했던 팔거현이 ‘칠곡도호부(漆谷都護府)’로 승격되고,

이후 약 180년 동안 부의 치소(治所)인 읍치를 산성 내에 두었으며, 진관(鎭管)은 4개 현(군위, 의흥, 신령, 하양)을

관장하였다.
칠곡도호부관아(官衙)가 험준한 산정에 있게 된 후, 읍민들은 불편한 점이 많아 관아를 옮기기를 갈망하여 왔다.

1819년(순조 19)에 왕명(王命)에 의하여, 평지인 팔거구지(八莒舊地)로 읍치를 옮기고, 이후로 가산산성 수성은 가산진의

별장이 담당하였다. 1648년(인조 26)에는 제6대 칠곡도호부사 이지형(李枝馨, 1608~?)이 경상감사 이안(李曼, 1605~1652)

과 합심하여, 군병과 승려를 동원하여 불과 수개월 만에 건물(建物)·포루(砲樓)·남쪽 곡성(曲城)·북쪽 구책(舊柵) 등을 중수

(重修)하였다. 외성(外城)은 1700년(숙종 26) 경상도 관찰사 이세재(李世載, 1648~1706)의 장문(狀聞:임금에게 글을 올림)

으로 왕명을 받아 1701년에 완성하였다. 중성(中城)은 1741년(영조 17) 경상도 관찰사 정익하(鄭益河)가 장문하여, 왕명으로

그 해에 완성되었다

가산산성에는 식량과 병기를 충분히 비축할 양창(糧倉, 남창·북창)·군기고(軍器庫)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특히 중성의

성벽은 내·외성에 비해 작고 동문은 홍예문(虹霓門, 무지개문)이었다. 1812년(순조 12)에는 가산산성에 별장(종9품)을 두고

가산진(架山鎭)을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