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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산행기

가산산성[架山山城] 산행

* 사적 제216호이며 임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잇따른 왜침에 대비하기 위하여 축성된 가산산성 진남문의 전경


1. 산 행 지 :가산(902m)-가산산성/ 경북 칠곡군

2. 산행일자 : 2010년 04월 11일(일) / 흐림

3. 산 행 자 : 동생,아들과 함께

4. 산행경로 : 진남문-해원정사-동문-중문-가산바위-습지-가산정상-827봉-동문-진남문(이정표 기준8.6km)

5. 산행시간 :3시간 40분(12:00~15:40)

6.가산산성지도

8. 산 행 기

사적 제216호이며 잇따른 왜침에 대비하기 위하여 축성된 가산산성 진남문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가산성은 만 길이나 되는 산 위에 있으며 남북으로 통하는 큰길을 가로질러서

큰 요충지라 할 수 있다"고 되에있는 곳이다

진남문의 성문을 지나....


해원정사


동문-남문-가산바위-가산-치키봉으로 산행경로로 생각하고 직진하여 오른다


동문 가는길의 너덜길


계곡에서 직등하는길이 있으나 임도길을 따른다

임도길을 지그재그 걷다보면 가산산성 동문 뒷모습이 보인다


동문을 빠져나와....


가산산성 동문의 모습

당초엔 이 성문 서쪽 구간만 성안으로 편입되면서 이 문이 '동문'으로 칭해졌다. 그러다 그 동쪽 구간으로도 성의 영역이

확장됨으로써 '동문'은 가산성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가 아니라 성 안의 중간문으로 변했던 듯 하다

개울을 지나 중문으로 오른다


중문 가는길의 풍경


용바위,유선대 갈릴길


가산산성 중문의 뒷모습


가산산성 성곽을 따라 가산바위로,......


가산바위 입구의 안내문


가산의 명물격인 가산바위


가암()이라고도 불리는가산바위

사면이 깎아지른 듯이 우뚝 솟아 있는 바위로,상면에80평 정도의 넓은 평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평지 동쪽에

큰 구멍이뚫려 있다. 사방이 트여 있어 바위 위에 서면 남쪽으로 대구광역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도선()이 지기()를 잡으려고 바위 위 구멍 안에 쇠로 만든 소와 말의 형상을 묻었는데

조선시대 관찰사 이명웅()이 성을 쌓으면서 없애버렸다는 전설이 전한다(안내문의 내용)

가산바위에 오르면 황학산과 유학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산바위에서 본 가팔환초의 들머리인 계정사와 두무지가 보이고...


중문에서 갈라지는 814봉과 여릿재 능선


일반 사람들이 잘가지 않는 가산[架山] 정상이 보인다


가산바위를 내려와 중문을 지나.....

정상가는 길에 습지인 연못을 지나....


습지에서 정상 사면길에는 복수초가 한창이다


복수초


이곳이 용바위인지? 돌출 전만대에 올라보면....


돌출전망대바라본 팔공산의주능선


북창마을의 전경


유선대라는 전망대도 보인다

깎아지른 절벽들과 돌봉우리들. 그 절경지는 간혹 '용바위' 혹은 '삼칭이"라는 말로 지칭되는 듯 했다.

'용바위' 역시 특정 절벽 줄기 하나만을 가리킬 뿐 아니라 전래명칭도 아닌 듯 했다.

인근에서는 '유선대'라는 것이 있다는 이정목이 있으나 어떤것이 용바위,유선대인지 영????

전망대에서 바라본 암릉


가산[架山 901.6m] 정상


암문(暗門)은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은밀한 곳에 일반 성문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개구부를 내어 출입하는 성문의 일종이다가산산성에는 정식 문이름이 붙여진것 이외에 군대군대 사람이 드나들수 있게 문이 많들어져 있다


성곽길을 따라....


한티재 갈림길 이정목의 827봉

몸상태가 좋지않아 할비바위-치키봉은 포기하고 이곳에서 동문으로 내려간다


또다른 성곽길을 내려오면 동문 상단부에 이른다


동문을 지나....


몇차례의 임도길을 넘나들고.....

대숲을 지나

공원관리사무소에 닿는다



가산산성 진남문



가산산성[架山山城]

경북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
가산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잇따른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가산( 架山)요새에 삼중(三重)으로 축성되었다.

1639년(인조17)에 경상도 관찰사로 제수된 이명웅(李命雄, 1590~1642)이 “경상도 60주(州) 산성 중에 믿을 만한 곳은

진주(晋州)·금오(金烏)·천생(天生)의 3성 뿐이므로 적지(適地)에 축성할 것”을 상주(上奏)하였다.

도임 후 천생산성(天生山城)은 형세가 험하기는 하나 좁고 천정(泉井)이 없으므로, 금오산성(金烏山城)을 가축(加築)하는

한편, 최적지인 팔거현의 가산(架山)에 축성할 것을 계청(啓請)하고, 그해 9월부터 이듬해(1640년) 4월까지 내성을 쌓았다.

가산산성이 축성되면서 5월에는, 경산부(京山府: 현재 성주)에 속했던 팔거현이 ‘칠곡도호부(漆谷都護府)’로 승격되고,

이후 약 180년 동안 부의 치소(治所)인 읍치를 산성 내에 두었으며, 진관(鎭管)은 4개 현(군위, 의흥, 신령, 하양)을

관장하였다.
칠곡도호부관아(官衙)가 험준한 산정에 있게 된 후, 읍민들은 불편한 점이 많아 관아를 옮기기를 갈망하여 왔다.

1819년(순조 19)에 왕명(王命)에 의하여, 평지인 팔거구지(八莒舊地)로 읍치를 옮기고, 이후로 가산산성 수성은 가산진의

별장이 담당하였다. 1648년(인조 26)에는 제6대 칠곡도호부사 이지형(李枝馨, 1608~?)이 경상감사 이안(李曼, 1605~1652)

과 합심하여, 군병과 승려를 동원하여 불과 수개월 만에 건물(建物)·포루(砲樓)·남쪽 곡성(曲城)·북쪽 구책(舊柵) 등을 중수

(重修)하였다. 외성(外城)은 1700년(숙종 26) 경상도 관찰사 이세재(李世載, 1648~1706)의 장문(狀聞:임금에게 글을 올림)

으로 왕명을 받아 1701년에 완성하였다. 중성(中城)은 1741년(영조 17) 경상도 관찰사 정익하(鄭益河)가 장문하여, 왕명으로

그 해에 완성되었다

가산산성에는 식량과 병기를 충분히 비축할 양창(糧倉, 남창·북창)·군기고(軍器庫)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특히 중성의

성벽은 내·외성에 비해 작고 동문은 홍예문(虹霓門, 무지개문)이었다. 1812년(순조 12)에는 가산산성에 별장(종9품)을 두고

가산진(架山鎭)을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