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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풍경

예천 용문사[龍門寺]

* 신라시대 870년(경문왕 10년)에 두운()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용문사의 보광명전

일주문


회전문()

해운루



주전인 보광명전


대장전(殿:보물 145)



극락보전


해운루






응진전(殿)


성보박물관



국내 유일의 윤장대(:보물 684)

내부에 불경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의례를 행할 때 쓰던 도구이다.


용문사[龍門寺]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龍門面) 내지리 용문산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이다. 《김룡사본말사지 》에 따르면,
신라시대 870년(경문왕 10)에 두운()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두운이 이 산의 동구에 이르렀을 때
바위 위에서 용이 영접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용문사라 하였으며, 절을 짓기 시작하였을 때 나무둥치 사이에서
무게 16냥의 은병()을 캐어 공사비에 충당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 정벌 중에 이 절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훗날 천하를 평정하면 이곳에 큰 절을 일으키겠다
는 맹세를 하였다. 그뒤 936년(태조 19)에 칙명으로 이 절을 중건하였고, 매년 150석의 쌀을 하사하였다. 이후
이 절에는 두운의 법맥이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영련은 이곳에서 30년 동안 수도하다가 조응()에게 법()을
전하였고 조응은 제자 자엄()과 함께 여러 법당과 승방 등을 건립하였다.
1165년(의종 19)에는 왕의 칙명으로 중수하였으며, 1171년(명종 1) 태자의 태()를 보관한 뒤 절 이름을 창기사
()로 바꾸고 축성수법회()를 열어 낮에는 《금광명경 》을 읽고, 밤에는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의식을 항규()로 삼았다.
이 법회를 끝마친 뒤 다시 선문구산()의 승려 500명을 모아 50일 담선회()를 열었다.
그때 단속사()의 선승 효돈()이 《전등록 》 《능엄경》 《인악집 》 《설두집
《염송》 등을 강()하였다. 1173년 나라에 내란이 일어나자 3만 승재()를 열고 1180∼1182년에 대법회를
열었는데, 개태사()의 국통 전치()가 강을 맡았다.
1478년(성종 9) 소헌왕비()의 태실()을 봉안하고 1480년 정희왕후()가 중수하여 성불산 용문사
라 하였으나, 1783년(정조 7) 문효() 세자의 태실을 봉안하고는 다시 소백산 용문사로 고쳤다.
이 절에는 세 가지 이적이 있었는데, 첫째는 두운의 창건 때 용이 영접한 일이고, 둘째는 은병을 캐어 절을 공사비에
충당한 일이며, 셋째는 절의 남쪽에9층 청석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할 때 4층탑 위로 오색구름이
탑 둘레를 돈 일이다.
문화재로는 윤장대(:보물 684), 용문사 교지(보물 729), 목불좌상 및 목각탱(:보물 989), 대장전(殿:
보물 145), 자운루(경북문화재자료 169)가 있으며,그밖에 현존하는 당우로 진영각(), 명부전(殿),
응진전(殿), 회전문(), 범종루, 강원, 천불전(殿), 일주문, 요사채, 두운암()과 1984년 화재로
모두 불탔다가 복원된 보광명전(殿), 응향각(), 단하각, 해운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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